자이라의 기사임명식이 있던 날이었다. 기사 수업을 모두 마친 후, 시험을 단번에 통과하려 기사가 된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자이라는 기사 수업을 받는 동안 줄곧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을 보였다. 기사임명식이라고 해도 그저 행사에 그치지는 일이었다. 총 서른 명의 신입 기사들이 사르디나의 무궁한 영광과 평화를 지키겠노라 맹세하는 행사가 끝난 뒤, ...
카를로스 파올로 글로리어스 3세는 18세가 되기만을 기다려왔다. 18세가 되는 그날은 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난 날이기도 하지만 특정한 세상에서 태어나는 날이 될 것이라고, 카를로스는 몇 년간 믿어왔다. 하우스가 없으면? 그럼 아무것도 못하는 거지, 뭐. 중학생 무렵, 아는 사람을 따라 갔던 ‘무도회’에서 어떻게 해야 ‘저런 것’을 할 수 있냐 묻자 그런 답을...
"거기, 무슨 일이십니까?” 낭랑하지만 무게 있는 목소리가 들리자,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이 반사적으로 멈추었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에 익은 기사단복을 입은 자가 저벅저벅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 멋진 기사군. 크롬은 자신의 짐을 되돌려 받으려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했다. 기사 된 자로서 어쩔 수 ...
발터라는 이름의 남자는 진짜로 약속을 지켰다. 그는 매주 몇 번씩 자이라와 만나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셨다. 점심일 때도 있었고, 저녁일 때도 있었다. 정 시간이 나지 않거나, 오히려 시간이 날 때면 지나가는 길에 자이라에게 들러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누곤 하였다. 사르디나의 복지는 평범했다.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가 보장되었고, 자이라는 시설에도, 학교...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빗속에서는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밤에 자이라는 몰래 숙소를 빠져나왔다. 맑은 날이 많은 플로렌스에서는 비가 오는 날을 고를 수가 없었다. 비가 온다면 무조건 실행해야 하는 작전이었다. 차라리 거센 빗줄기라 다행이었다. 발자국은 빗물에 쓸려 내려가고, 국경에서는 자이라의 형체가 잘 보이지 않을 테였다. 자이라...
크롬 경께 드립니다. 엘펜하임에서 보내 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사실 잘 받았다는 것만으로 큰일이었습니다. 파견 근무를 모두 마치고 짐까지 다 꾸려 숙소를 떠나려는 찰나에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발신인만 대충 확인한 채로 상의 안주머니에 편지를 넣어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도 모르는데,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을 읽은 것만으로 상...
투명한 유리잔의 겉면에 물방울이 맺혔다. 이제 초여름이라 하기에는 햇볕이 제법 따가웠다. 크롬은 유리잔을 한 손에 꼭 쥐어 보았다. 친정집, 그러니까 결혼을 한 상태였을 때는 친정이라 불렀던 곳, 에도 이런 것이 있었다. 여름이면 어머니는 투명한 유리 물병에 얼음과 물을 가득 채우고 자른 레몬 따위를 띄워 두었다. 크롬은 어느 집이건 그렇게 하고 사는 줄로...
성이 없다는 것은 얽매일 가문이 없다는 뜻이다. 자이라로 시작하며 끝나는 이름을 가진 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누가 뭐라 하든 새 시대는 기어코 시작될 것이며, 그때에 자신의 발목을 붙잡을 존재는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새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자신이 바람을 일으키겠다고 생각했다. 그 바람을 타고 막힘 없이 나아가고 싶었다. 한때는 성 씨를 욕망...
그해는 새로운 실습이 처음 도입된 때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실습이 이뤄진 것은 그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20세기와 21세기 인간들이 만들어 둔 ‘우주 정거장’보다 조금 더 바깥으로 나갔다가 ‘우주 정거장’에서 수리나 물건 운반 등의 과제를 하고 오는, 아주 간단한 실습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우주선을 몰게 된다는 생각에 학생들은 모두 흥분을 감추...
세상에서 가장 고지식하고 재미없는 남자의 사랑 고백을 들었다. 들으려고 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져 물이라도 마시려다 아래 층의 말소리를 듣게 된 것이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에 처음에는 정말 못 말리는 기사들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목소리의 주인들은 가장 먼저 훈련장에 나타나고 가장 늦게 방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평소에도 이 ...
친애하는 자이라 경께 엘펜하임에서 파견 근무 중에 서신 보냅니다. 북부 지역인 엘펜하임의 날씨에 대해서는 자이라 경께서도 이미 익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책으로도 읽고, 몇 차례 짧게 방문한 적이 있어 크게 염려치 않고 파견에 나왔습니다만, 제 식견이 부족했습니다. 엘펜하임의 추위는 어찌 언어로 옮길 수 없는 지경입니다. 저와 함께 파견을 나오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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